그날 이후(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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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옹지마
며칠 동안 많이 아팠습니다. 장딴지와 엉덩이가 너무 아파서 서거나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쓰던 지팡이를 짚고 또 바퀴 달린 의자를 휠체어로 삼아 거실을 다녔습니다. 당신의 눈높이에서 집안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휠체어에 앉아서도 여기저기 닦고 정리하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병원 갈 때마다 0부터 10까지 그려져 있는 Pain Scale을 보면서 10에 해당하는 pain은 도대체 얼마나 아플까 생각하곤 했는데 이번에 그것을 제대로 체험합니다. 나는 원래 미련하고 공감 능력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이라서 아픈 사람 어려운 사람의 삶을 잘 느끼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몸으로 겪어 보니까 이제는 그 아픔과 어려움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심하던 통증..
2021.03.17 -
응급실에서
지난 금요일 응급실을 다녀왔습니다. 작년 1월 당신이 아파서 처음 방문한 바로 그 응급실 그 뒤로도 몇 번 더 와야 했던 그곳 그리고 다시는 오기 싫었던 바로 여기에 내가 누워 있습니다. 편안히 누워서 의사를 기다리는 시간에 발가락 꼼지락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당신은 그렇게 아파서 누워 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감정이입이 되어 힘들어집니다. 몸이 불편하고 아프게 되니까 혼자 산다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평소에 건강하던 내가 아주 가끔 아플 때면 소리 내어 끙끙대고 거기다 엄살까지 보태곤 했어요. 그러면 당신이 와서 내 옆에서 나를 참 잘 돌봐 주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큰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습니다. 엄살도 안 통하고 그저 혼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2021.03.15 -
전파선교사
원운경 씨가 전파선교사가 되었습니다. 친구분이 앞으로도 계속 당신과 함께 하는 방법으로 당신을 극동방송 전파선교사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많은 분이 원운경 씨 투병 중에 우리를 도우셨고 그 후에도 당신의 삶을 기억해 주십니다. 참 감사합니다. 잘 살고 갔어요. 너무 짧아서 아쉽지만, 그대의 삶을 오래 기억하며 나도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남은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수고했어요. 고맙습니다. www.youtube.com/watch?v=S5dcSZXdc7c
2021.03.10 -
산책길에서
오랜만에 밖에 나왔습니다.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힘이 듭니다. 당신과 함께 자주 걷던 산책길을 한 바퀴 돌아서 오려고 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집까지 잘 갈 수 있을까 걱정입니다. 같이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걸었습니다. 투병 중에도 가끔 걷곤 했는데 내가 힘들어 보니 당신은 그때 엄청 힘들었겠다 생각이 듭니다. 힘들다 못 걷겠다 한마디쯤 했을 만도 한데 전혀 말을 안 해서 나는 몰랐어요. 얼마나 힘들었는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5개월 만에 처음으로 밖에 나왔네요. 개구리도 아니고 그라운드 호그도 아닌데. 10월에 휠체어를 탄 당신과 산책한 것이 마지막이지요. 짐에 가서 운동한 지도 1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이제 다시 걷고 다시 뛰어야겠습니다. 봄이 오고 있으니까요.
2021.03.09 -
감정이입
티브이에서 장애를 가진 사람이 열심히 사는 모습에 울음이 터집니다. 감정이입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당신이 뇌수술 후 11개월 동안 투병하며 하루하루 겪었던 그 모든 어려움 상실감을 이제야 나는 절실하게 느낍니다. 당신 옆을 지키면서 치료가 잘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리라 더 악화하지 않으리라 희망을 품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 어려웠던 시간이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떠나고 나니 이제 내 마음에 당신의 아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들어옵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어렵습니다. 이제는 나 혼자 사는 법을 찾아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하고,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안 되지만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것이고 또 그다음 날도 살아갈 겁니다. 평생을 무심한 남편으로 산 나를 떠나면서 당..
2021.03.07 -
미역국을 끓이며
오늘은 우리 아들 어진이 생일입니다. 만으로 스물여덟 살 되는 생일을 축하합니다. 돌잔치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스물여덟 번 생일 중 오늘 처음 내 손으로 생일 미역국을 끓입니다. 이렇게 내가 어진이 생일 아침을 차려줄 일은 아마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습니다. 혼자서 미역국을 끓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깁니다. 어진이는 오늘 아침 엄마 없는 생일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할까. 기쁘고도 슬프며 반갑고도 쓸쓸하지 않을까. 한 달 뒤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면 그동안 반년 동안 나와 같이 살면서 서로 아웅다웅했던 것들을 후회하고 마음이 아프지는 않을까. 28년 전 오늘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신은 오랜 시간의 산고로 기진맥진 끝에 어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해 주었고 나는 의사의 권유로 내 손으로 탯줄을 잘랐습니다. ..
2021.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