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치료(51)
-
콩나물국
원운경 씨가 콩나물국을 먹고 싶다고 해서 병원 갔다 오는 길에 한국마켓에 들려 콩나물을 샀습니다. 비록 초보지만 한 번 잘해보자 마음먹고 콩나물국을 끓였습니다. 다시마에 멸치 해물 팩 넣고 국물을 우려내고 콩나물을 넣고 끓인 후에 얼려 놓았던 다진 마늘을 팍팍 넣었습니다. 간장과 소금으로 간하고 파는 없지만 대신 시원한 맛을 내려고 청양고추를 살짝 넣었습니다. 맛을 보니 뭔가 이 퍼센트 부족한 듯하지만 그래도 먹을 만합니다. 원 여사님 점심으로 밥 좀 말아서 콩나물국밥을 해 주고 맛있냐고 물으니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별로라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콩나물국이 먹고 싶어서인지 성의를 봐선지 먹어 주시기는 하십니다. 남은 다진 마늘을 다시 냉동실에 넣다가 살짝 맛을 보니 놀랍게도 마늘에서 호박 맛이 ..
2020.10.15 -
전업주부
전업주부가 된 지 반년이 넘었습니다. 원운경 씨가 아프기 전에, 내가 전업주부로 살았으면 좋겠다, 역할을 바꾸자 농담 삼아서 말하곤 했는데, 말이 씨가 된다고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실 그동안 주위의 여러분들이 귀한 음식을 가져다주시고 많은 도움을 주셔서, 내가 전업주부로서의 일을 제대로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가끔 모든 것이 힘들게 느껴집니다. 식구도 많지 않은데 왜 이렇게 할 일이 많아 보이는지 일을 해도 바로 똑같은 일이 또 쌓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좀 지치기도 합니다. 원운경 씨는 이 일을 30년 넘게 했습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해 그 모든 일을 하면서 힘들다 지친다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겨우 반년 남짓 반쪽 전업주부로 살면서 내가 힘들다 지치다 말할 수 없습니다. 다..
2020.10.12 -
꿈
나쁜 꿈을 꾸다 깨었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꾸는 이 악몽의 주제는 언제나 동일합니다. 꿈의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는데,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찌어찌 각종의 사건과 갈등이 얽히고 그러다 결국은 박사학위를 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꿈속에서 괴로움에 바둥바둥하다 간신히 깨어나면 머리와 몸이 다 아픕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온 것을 깨닫고 안심합니다. 27년 전에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네 명의 커미티 멤버들이 논문 제안 심사를 했습니다. 내 발표가 끝나고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더니 꽤 오랜 시간을 논의합니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며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하나님께 “합격하게 해 주세요,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정말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합격..
2020.10.07 -
희망과 소망
우리에게 희망이 없다면 삶은 참 슬픈 겁니다. 어쩌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삶은 참 무의미한 겁니다. 소망이 없는 인생은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만나면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원운경 씨가 퇴원 열흘 만에 처음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서 보행기를 잡고 걸었습니다. 이제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어봅니다. 침대 위에서의 생활은 1차원, 휠체어에 앉아서는 2차원의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3차원의 세계를 온전히 느끼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온전한 공간에서 생각이 자유로워지고, 당신이 평생 가졌던 소망을 붙잡고 나갈 수 있길 바랍니다.
2020.10.07 -
어진이와 나
어진이가 도와주러 집에 온 지 벌써 6주가 됩니다. ‘어진+나’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조합으로 함께 밥도 하고 살림을 하면서 원운경 씨가 필요한 많은 것을 돕습니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인지 가끔 아니 자주 서로 티격태격합니다. 어진이는 나를 닮았고 또 나와 다릅니다. 똥고집에 자기 생각 방법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나를 닮았고, 일을 빈틈없이 꼼꼼하게 하는 것은 나와 다릅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은 어진이 마음에 안 드니 서로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어진이를 많이 이뻐했습니다. 너무 이뻐서 예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한동안 예람이 보다 어진이가 더 이뻐 보였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아마도 고딩 때부터인가 내가 타지로 일을 하러 집을 떠나면서부터인가 서로 부딪치거나 감정이 격해지는 일이 생겼습니다. ..
2020.10.03 -
10월 1일 추석 가을날에
문득… 10월 1일입니다. 추석입니다. 창밖을 보니 가을입니다. 원운경 씨가 매우 아프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이 1월 말이었는데,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1월 말이면 몹시 추운 겨울이었을 텐데 언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월 말에 설날이 바로 지났을 때였는데 오늘은 어느덧 추석입니다. 정신없이 참으로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따져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원운경 씨에게는 지난 8개월이 어떤 시간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어렵고 힘든 그 모든 과정에서도 늘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감당했던 당신인데, 지금은 어떤 생각으로 10월 1일 추석 가을날을 살고 있는지요.
2020.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