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차(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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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터널의 끝자락에서
제정신이 많이 돌아왔습니다. 당신을 보낸 지 어언 2년 반. 그 세월의 흐름에서 이제 나는 이전의 정신을 80퍼센트 이상은 되찾은 것 같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느꼈던 충격, 분노, 슬픔, 그러한 감정으로 점철된 어두운 터널에서 이제 출구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행하면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이겠다. 80퍼센트 이상은 아닐 수도 있겠다. 아직도 감정 컨트롤이 안 될 때가 많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는 이 상태가 어쩌면 나의 새로운 정상 100퍼센트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긴 터널의 끝자락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저 터널의 끝은 당신과 함께했던 터널 전의 세상과는 아주 다를 것입니다. 그전의 세상은 젖과 꿀이 흐르는 푸른 초장이었다는 것을 당신을 보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제 그 터널을 빠..
2023.06.10 -
로드트립
차 몰고 동네 한 바퀴 돌았습니다. 동네가 워낙 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리고 거리도 꽤 깁니다. 2주 반 동안 4,500마일 정도 달렸습니다. 여기저기 들러서 구경도 하고 멍때리며 운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합니다. 이렇게 혼자 하는 여행은 편하고 재미도 있지만 한편 쓸쓸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작년부터 시작한 나만의 로드트립. 멋대로 떠나는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는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리 실속은 없습니다. 컵라면과 스낵 박스를 싣고 다니며 하루에 한 끼 정도 사 먹고 숙소도 가급적 싼 곳에서 자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상하는 그런 멋진 여행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도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시간제한 없이 다닐 수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이번 여행의 ..
2023.06.08 -
어머니날 아침에
서울에 있는 딸에게서 해피 어버이날 문자가 왔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입니다. 사실 이날은 옛날 내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날이었습니다. 어버이날로 바뀐 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이날이 아직도 내 마음에는 어머니날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나는 하나님 나라에 계신 엄마를 생각합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떠났습니다. 아쉽게도 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기억력이 없다는 것을 고려하더라고 엄마에 대한 기억 추억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만 열 살이면 기억이 없을 정도로 아주 어린 나이는 아닌데. 너무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어린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어쩌면 그 트라우마 속에서 나 자..
2023.05.09 -
아버지
아버지가 하나님 나라로 가신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상하게도 오늘 아버지가 유난히 그립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그 이후 격동의 역사 안에서 오롯이 혼자서 어마어마한 역경을 견디어 내신 아버지. 그 삶의 무게와 과정을 나이가 많이 들어서야 뒤늦게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당신을 존경하는 마음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집니다. 하나님 나라로 떠나시기 전에 내가 깨달았다면 좀 더 감사하고 뭐래도 좀 잘 해드렸을 텐데 철이 없어서 그러질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내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나 자신은 참으로 부족합니다. 아버지의 발끝에도 못 따라갑니다. 나보다 백배 천배는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어렵다 한 말씀 없이 다 감당하셨는데 나는 백분의 일 천분의 일도 안되는 어려움에도 휘청거리고 허덕입니다...
2023.05.06 -
곤이지지(困而知之)
공자는 논어에서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아는 자(깨우침이 빠른 자)가 으뜸이고, 배움을 통해서 아는 자는 그다음이며, 깨우치는 데 부족함이 있지만 고생고생하면서 어렵게 배우는 자가 또 그다음이다. 공자 스스로 자기는 생이지지가 아니라 학이지지라고 하였다니 나 같은 보통 사람은 곤이지지인 것이 그리 부끄러운 일은 아닐 것 같습니다. 문제는 곤이불학(困而不學), 배움이 부족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서도 배우려 하지 않는 사람이 공자가 말하는 하등 인간인가 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공자의 말씀을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적용해 봅니다. 태어나면서 그것을 알고 들을 수 있다면 아마도 선지자이겠지요. 성경..
2023.04.18 -
나쁜 아내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졌습니다. 일 년의 반이 겨울 같은 위스콘신에도 봄은 돌아옵니다. 올해는 여느 해보다 조금 이르다 싶게 봄이 오는 것 같습니다. 반소매 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 미루어 놓았던 다림질을 했습니다. 겨우 셔츠 여덟 개를 다렸을 뿐인데 온몸이 뻐그덩합니다. 몇 번 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림질은 할 때마다 엄청 힘이 듭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내 일상에서 해야 할 일의 80~90퍼센트는 당신이 해준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군소리 잔소리 한번 없이 늘 해 준 사람. 당신은 참 나쁜 아내입니다. 힘들다 어렵다 했으면 나도 정신 차리고 같이 했을 텐데 함께 도우면서 살았을 텐데 그러면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배웠을 텐데. 모든 것을 다 해 주고 훌쩍 떠나버린 사람 그래서..
2023.04.08